국채가 ‘안전자산’인데 왜 시장이 마비됐나 — SLR 규제와 국채 유동성의 역설

2020년 3월,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치던 순간 금융시장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주식이 폭락하자 투자자들은 반사적으로 '가장 안전한 자산'인 미국 국채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국채 시장이 오히려 얼어붙었습니다. 사려는 사람도, 팔려는 사람도 있는데 중간에서 거래를 성사시켜줄 '중개자'가 사실상 사라진 것입니다. 연준은 단 며칠 만에 수천억 달러 규모의 국채를 긴급 매입해야 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깊고 유동적이라는 미국 국채 시장이 왜 그 순간에 기능을 멈췄을까요? 답의 핵심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습니다 — 바로 은행 자본 규제입니다.

Basel III와 SLR — 좋은 의도로 만든 규제의 구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 금융당국은 "은행이 너무 빚을 많이 끼고 장사했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 반성의 산물이 Basel III라는 국제 은행 건전성 기준입니다. Basel III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은행의 과도한 레버리지를 제한합니다.

  • 위험가중자산(RWA) 기반 자본비율: 자산의 위험도에 따라 가중치를 적용합니다. 국채처럼 '안전한' 자산은 위험 가중치가 0%에 가깝습니다.
  • 보완적 레버리지 비율(SLR, Supplementary Leverage Ratio): 자산의 위험도를 따지지 않고, 모든 자산(+ 부외 익스포저)에 대해 일정 비율 이상의 자본을 보유하도록 강제합니다. 미국의 대형 은행 지주사는 3%, 그 예금 수취 자회사는 6%의 SLR을 유지해야 합니다.

문제는 SLR의 설계 방식에 있습니다. 위험가중 방식과 달리, SLR은 국채든 정크본드든 현금이든 모든 자산을 똑같이 '레버리지 익스포저'로 계산합니다. 즉, 은행이 국채를 1조 원어치 사면 그에 상응하는 자본을 그만큼 더 쌓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국채가 아무리 안전해도, 규제 관점에서는 그냥 '대차대조표를 부풀리는 자산'일 뿐입니다.

딜러 은행의 딜레마 — 규제가 만드는 중개 능력의 천장

미국 국채 시장의 거래는 20여 곳의 '일차딜러(Primary Dealer)' 은행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골드만삭스, JP모건, 씨티그룹 같은 대형 은행들이 국채를 대량으로 사고팔며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들은 시장에서 국채를 매입해 재고로 쌓아두었다가 반대편 투자자에게 파는 방식으로 '마켓메이킹'을 합니다.

그런데 SLR이 문제를 만듭니다. 딜러 은행이 국채를 재고로 보유하면 할수록 레버리지 익스포저가 늘어나고, SLR 비율을 맞추기 위해 더 많은 자본을 쌓아야 합니다. 자본은 공짜가 아닙니다. 자본 비용이 올라가면 딜러는 국채 재고를 줄이거나, 매수-매도 스프레드를 벌려 수익성을 방어합니다. 결국 딜러가 소화할 수 있는 국채 물량에는 규제가 정한 '천장'이 생기는 것입니다.

실제로 BIS(국제결제은행) 통계를 분석한 여러 연구들은 2010년대 이후 미국 일차딜러의 국채 재고가 국채 발행 잔액 대비 비율로 보면 크게 줄어들었음을 보여줍니다. 국채 시장의 규모는 해마다 커지는데, 이를 중개하는 딜러의 '버퍼 능력'은 규제 제약 속에서 제자리를 맴돈 셈입니다.

미 국채 10년 금리2025.09.11 ~ 2026.09.11 · 단위 %4.97%2026.09.11 · 기간 초 대비 +0.96%p3.87%4.17%4.46%4.76%5.06%2025.092026.012026.052026.09
미 국채 10년 금리 — 출처: Yahoo Finance, 2026.09.11 기준. 글 발행 시점의 값이며 최신 값은 출처에서 확인하세요.

2020년 3월 — 교과서가 현실이 된 순간

2020년 3월 중순, 코로나19 충격으로 전 세계 투자자들이 패닉에 빠졌습니다. 달러 현금이 필요해진 헤지펀드와 외국 중앙은행들은 보유 중이던 미국 국채를 대량으로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동시에 반대편에서는 국채를 사려는 수요도 몰렸습니다. 거래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딜러 은행들은 이 물량을 흡수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SLR 제약으로 대차대조표가 이미 한계에 가까워진 상황에서 추가로 국채를 쌓는 것은 규제 위반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매수·매도 스프레드가 평소의 수십 배로 벌어졌고, 가격 발견 기능이 마비되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동적이어야 할 시장이 '거래가 안 되는 시장'이 된 것입니다.

연준은 즉각 개입했습니다. 우선 단기 레포 창구를 통해 수천억 달러 규모의 유동성을 공급했고, 이어서 국채와 주택저당증권(MBS)을 직접 매입하는 긴급 양적완화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2021년 3월까지 한시적으로 SLR 계산 시 미국 국채와 지급준비금을 레버리지 익스포저에서 제외하는 임시 면제 조치를 실시했습니다. 이 면제 조치 덕분에 딜러 은행들은 추가적인 자본 부담 없이 국채를 흡수할 수 있게 되었고 시장은 빠르게 안정을 찾았습니다.

규제의 역설 — 흔히 놓치는 포인트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규제가 나쁘다"는 식으로 단순화합니다. 하지만 그건 핵심을 놓친 것입니다. SLR은 2008년 금융위기가 남긴 정당한 교훈에서 탄생했습니다. 위험 가중치를 교묘하게 낮춰 실질적인 리스크를 감추던 과거의 관행을 막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진짜 역설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국채는 위험하지 않지만, 국채 시장에는 유동성 위험이 존재합니다. 개별 국채 자산의 신용 위험은 0에 가깝지만, 시장 전체가 기능을 잃는 '시장 유동성 위험'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SLR은 개별 자산의 신용 위험만 신경 쓰다 보니, 국채를 위험 가중치 0%의 '착한 자산'으로 취급하면서도 동시에 SLR 익스포저로는 계산해버리는 이중적 구조를 갖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놓치기 쉬운 포인트는 미국 국채 시장의 구조적 변화입니다. 연준의 양적완화로 시중에 풀린 지급준비금이 은행 대차대조표에 쌓이는 것 자체가 SLR 익스포저를 늘립니다. 즉, 연준이 국채를 사서 유동성을 공급하면 → 은행 지급준비금이 늘고 → SLR 압박이 커져 → 딜러 능력이 오히려 제약받는 아이러니한 피드백 루프가 생깁니다. 통화정책과 은행 규제가 서로 엇박자를 내는 구조적 모순입니다.

2021년 3월 임시 면제가 종료된 이후 연준과 재무부, 그리고 BIS는 SLR 개편 논의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국채와 지급준비금을 영구적으로 SLR 계산에서 제외하거나, 계산 방식을 조정하는 방안이 거론되지만 아직 결론은 나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재무부 일반계정(TGA) 잔액 추이 · 2026-09-10 기준
날짜 잔액 전일 대비
2026-09-10 0.818조 달러 -26억 달러
2026-09-09 0.844조 달러 -36억 달러
2026-09-08 0.880조 달러 -9억 달러
2026-09-04 0.889조 달러 -15억 달러
2026-09-03 0.904조 달러 -
자료: 미 재무부 일일 재정보고(Daily Treasury Statement). TGA 잔액이 늘면 시중 유동성이 재무부로 흡수되고, 줄면 시장에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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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정리 — 그래서 나와 무슨 상관인가

미국 국채 시장의 유동성은 단순히 미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미국 국채 금리는 전 세계 모든 자산의 '기준 금리' 역할을 합니다. 국채 시장이 기능 장애를 일으키면 한국의 주식시장, 부동산 대출금리, 외환시장까지 연쇄적으로 흔들립니다. 2020년 3월처럼 국채를 팔고 싶어도 팔 수 없고, 국채 금리가 비정상적으로 급등하는 상황은 우리가 생각하는 '안전자산'의 개념 자체를 흔드는 사건입니다.

투자자로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자산 자체의 안전성과 시장의 유동성은 다른 개념이며, 규제 구조가 시장 인프라를 어떻게 제약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위기 시 자산 가격 움직임을 예측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됩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 국채 시장의 안을 더 깊이 들여다봅니다. 다음 시간에는 '국채 시장 마이크로스트럭처 — 일차딜러·헤지펀드·HFT가 만드는 유동성의 실체'를 다룹니다. 일차딜러가 실제로 어떻게 시장에서 움직이는지, 헤지펀드의 베이시스 트레이드가 왜 위기의 불쏘시개가 되는지를 살펴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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